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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이반 일리치의 죽음 <톨스토이>

여기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때부터 사흘 동안 이반 일리치의 비명 소리가 한순간도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
그 소리가 얼마나 처절하던지 방 두 칸을 사이에 두고도 듣는 이를 공포에 떨게 했다.  ... ...
이 사흘 내내 이반 일리치에게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는 눈에 보이지 않고 저항할 수도 없는 힘에 떠밀려 들어간 검은 자루 속에서 몸부림쳤다.
구원받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마치 사형집행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버둥거리는 사형수처럼 몸부림쳤다. 하지만 아무리 기를 쓰고 맞서도 자신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것에 점점 가까이 다가갈 뿐이라는 걸 매 순간 실감했다....

 

그는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걸까요? 어째서 이토록 고통스러워 하며 죽어가고 있는 걸까요.. 

 

그는 능력 있고 쾌활하고 선량하며 사교적이면서도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일은 철저하게 해내는 사람이었다. 그가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일은 바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는 어릴 때도 성인이 되어서도 아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날벌레가 불빛을 향해 날아들듯 아주 어릴 적부터 본능적으로 상류사회 사람들에게 이끌렸으며, 그들의 태도나 인생관을 습득하면서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에는 뭔가에 온 마음을 다해 열중하기도 했지만, 그런 시간은 그의 삶에 별다른 흔적을 남기지 않고 지나갔다.
여성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허영심에 빠져보기도 했으며, 고학년이 되어 졸업을 앞두고는 자유주의 사상을 탐닉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본능이 옳은 것이라고 일러주는 일정한 범위를 벗어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이반일리치의 삶은 대체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적당히 속물적이고 적당히 현실적이며 그저 남들처럼 현실과 타협하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이반 일리치가 아직 젊고 가볍게 즐기는 걸 좋아하는 성향이긴 했지만, 일할 때만큼은 굉장히 신중하고 꼼꼼했으며 엄격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사람들과 어울리는 자리에서는 대체로 장난스럽고 재치가 넘쳤으며 늘 너그럽고 공손했다. 이반 일리치를 한 가족처럼 아끼던 지사 내외는 이런 그를 두고 '좋은 젊은이'라 부르기도 했다.

 

뭐 이정도면 그럭저럭 열심히 잘 살아온 인생아닙니까?

나름 자리를 잡게 된 이반일리치는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던 아내를 만나 결혼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반 일리치에게 그 결혼은 프라스코비야 표도로브나 같은 여성을 아내로 맞아 자신의 만족감을 채우는 일이면서, 동시에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옳다고 여기는 일을 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이반 일리치는 결혼했다.

 

 

 

여러모로 만족스러웠던 결혼생활은 아내가 임신을 하면서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합니다.

아내는 별 이유도 없이 질투를 하고 매사에 트집을 잡으면서 사납고 거칠게 굴기도 합니다.

남편도 집에 들어 앉아 자신처럼 우울해할 때까지 멈추지 않겠다고 단단히 결심한 것 같은 아내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이반 일리치는 일을 핑계로 아내에 맞서 자신만의 독립된 세계를 지켜나갑니다.

아내는 육아를 하며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때마다 남편이 함께 해 줄 것을 요구하지만,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 없는 이반 일리치는 오로지 가족에게서 벗어나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만 확고 해질 뿐이었죠....

어디서 많이 본 스토리 같네요.. 현대 사회의 부부들도 대개 이런 갈등을 겪지 않나요?ㅎㅎ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점점 줄여갔고, 부득이 함께 있어야 할 때는 다른 사람들을 집으로 불러 자신의 위치를 지키려 했다. 중요한 것은 이반 일리치에게 일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모든 삶의 재미를 일에 집중하면서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이 재미가 그를 삼켜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파멸시킬 수 있는 권력이 있다는 자각, 표면적인 것이긴 하지만 법정에 들어설 때나 아랫사람들을 만날 때 그에게 향하는 예우, 상급자와 하급자들 사이에서 거둔 성공, 그리고 무엇보다 그 스스로도 느끼는 뛰어난 업무 처리 능력, 이 모든 것이 그에게 기쁨을 주었다.
이와 함께 동료들과 나누는 대화와 식사 자리, 카드놀이 등이 그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이반 일리치의 삶은 그가 기대한 대로 즐겁고 만족스럽게 흘러갔다.

 

 

 

 

21세기를 사는 아무개씨 삶을 들여다보는 것만 같은 묘사네요. 

그렇습니다.. 그의 그런 삶을 우리는 비난할 수 있을까요? ..

그럭저럭 만족스럽게 살아가던 그의 삶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은 옆구리 통증이 시작되면서부터입니다.

이 통증의 원인을 알기 위해 여러 의사를 만나보지만 어느 누구도 시원하게 병명을 알려주거나 해결책을 제시해 주지 않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의사를 찾아갔다. 모든 것이 그가 예상한 대로였다. 평소와 똑같은 절차가 그대로 이어졌다.
차례를 기다리는 일이며 짐짓 근엄한 체하는 의사의 표정이 그랬다.
사실 이런 표정은 이반 일리치도 법정에서 늘 짓던 거라 낯설지 않았다.
또한 몸 이곳저곳을 두드려보고 청진기를 대보는 행동, 대답이 이미 정해져 있어서 굳이 답할 필요도 없는 질문들, '우리에게 맡기세요, 다 알아서 해결해드리겠습니다. 우린 어떻게 해야 할지 정확하게 알고 있으며, 언제든 구구에게든 똑같은 방식으로 처리해드릴 겁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진지한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게 법정에서와 똑같았다. 저명한 의사도 이반 일리치가 법정에서 피고를 대할 때와 똑같은 태도로 그를 대했다....
'이런저런 증상으로 보건대 환자의 몸속에 이런저런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저런 검사를 해도 정확히 확인할 수 없으면 이런저런 병을 가정해봐야 할 겁니다. 이런저런 병으로 가정한다면, 그때는 그러니까....'
이반 일리치가 알고 싶은 것은 단 한가지였다. '내 상태가 위중한간 아닌가?'
하지만 의사는 엉뚱한 질문이라는 듯 무시해버렸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통증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척 원래대로의 삶을 유지하려 노력하죠. 하지만 지속되는 통증은 다른이들에 대한 분노로 표출됩니다.

 

 

 

 

말로는 자신에게 안정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그 안정을 깨뜨리는 온갖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가 조금이라도 거슬린다 싶으면 버럭 화를 냈다.

 

 

 

병에걸린 자신을 대하는 아내의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남편이 병에 걸린 건 순전히 그의 잘못이며 그 병 때문에 아내인 자신을 또다시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이반 일리치는 그게 아내의 본심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마음 한편이 불편했다.

 

 

 

아내뿐만이 아닙니다. 그의 직장에서도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음을 느낍니다.

괜히 생기넘치고 품위있는 시바르츠를 볼 때면 10년전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화가 치밀기도 합니다.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듯 평소처럼 행동하려 하지만 어쩐지 그의 인생에 독이 스며들었고 이 독이 다른 이들의 삶에까지 번져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통을 숨기며 평소처럼 지내려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건강하고 혈색 좋은 처남은 단번에 그가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과장이라고? 누나 눈에는 안 보이는 거야? 매형은 죽은 사람 같아. 그 눈을 좀 봐. 생기가 하나도 없잖아. 대체 어디가 안 좋은 거야?"

 

 

 

더이상 정상인인척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이반 일리치는 의사 친구를 둔 친구 집으로 가서 그 친구와 함께 의사를 찾아가 오랫동안 얘기를 나눕니다.

드디어 자신의 병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는 것 같습니다.

의사의 설명을 듣고나니 어쩐지 자신의 병을 치료할 수 있을 것만도 같습니다.

그리고 왠지 몸이 좋아진 느낌도 듭니다. 통증도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이런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

 

 

 

그때 갑자기, 이제는 오래되어 익숙해진 통증, 묵직하면서도 찌르는 듯한 통증, 어느새 시작되어 집요하리만치 그를 괴롭히던 통증이 다시 느껴졌다.

 

 

 

 

그는 절망하며 혼잣말을 합니다.

 

 

 

"이건 맹장이나 신장의 문제가 아니라 삶 그리고 ..죽음의 문제야.
그래, 삶은 여기에 있다가 이제 서서히 떠나가고 있어. 그리고 난 그걸 막을 수 없는 거야.
그래, 이렇게 나 자신을 속여봐야 뭐하겠어? .....이곳에 있던 빛은 어느새 사라지고 온통 어둠뿐이구나.
나 역시 이곳에 있지만 곧 사라지고 말겠지! 대체 어디로 말인가?"

 

 

 

'내가 없어지면 그 자리엔 뭐가 남는 거지? 아무것도 없는 건가?
내가 없어진다면, 그렇다면 난 어디에 있는 걸까? 정말 내가 죽는 걸까? 아니, 난 죽고 싶지 않아!'

 

 

 

이렇게 죽음을 떠올리며 공포에 사로잡힌 그를 홀로 두고 문 저쪽 멀리에서 사람들의 노랫소리와 반주 소리가 간간이 들려옵니다. 

 

 

'그래 죽음이란 말이지, 그런데도 저들은 모르고 누구 하나 알려고 하지도 않고 나를 딱하게 여기지도 않는구나. 그저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어. 저들도 다를 게 없지. 언젠간 죽을 거야! 바보들 같으니! 내가 먼저 가고 저들은 나중에 가는 것일 뿐, 누구도 그 길을 피할 수 없는거야! 그런데도 마냥 즐거워하는구나. 저 짐승들!'

 

 

 

이반 일리치는 홀로 죽음의 공포에 맞서는 자신을 내버려둔 채 '삶'을 사는 이들에 대한 저주 같은 생각들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인간이다, 인간은 죽는다, 고로 카이사르도 죽는다'라는 논법이 카이사르에게만 해당되며 자신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이제껏 생각해왔다.
........
그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과는 완전히,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그는 엄마와 아빠, 미탸와 볼로댜, 장난감, 마부와 유모, 카텐카, 어린 시절과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의 모든 즐거움과 슬픔과 환희와 함께 존재해 온 바냐(이반의 어린 시절 애칭)였다.
어린 바냐가 그토록 좋아하던 줄무늬 가죽 공 냄새를 카이사르가 과연 알기나 했을까?
과연 카이사르나 바냐처럼 어머니의 손에 입을 맞췄을 것이며, 어머니의 비단옷에서 나는 사각사각 소리를 들어보았을까?

 

 

 

 

 

이반일리치에게 자신은 특별한 존재입니다. 대부분의 우리가 그렇듯 말이죠.

그래서 한번도 죽음이라는 것이 자신에게도 찾아오는 모두의 일반적인 그런..어떤 그런 것이라고는 절대 상상해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랬던 죽음이 지금 바로 자신의 코 앞에 다가와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가 죽어가는 것에 눈물을 흘려주지 않고 자신들의 삶을 살기에 바쁩니다.

마치 자기들은 죽지 않을 것 처럼 말이죠.

그러면서 그들은 거짓말을 합니다.

이반 일리치는 병이 들었을 뿐 죽는 것은 아니며 안정을 취하고 치료를 받으면 좋아질 것이라는 뻔한 거짓말을 말이죠. 

 

 

 

 

그리고 정말 이상하게도, 사람들이 빤한 거짓말을 그렇게 늘어놓는데도 "이제 거짓말은 그만해! 내가 죽는다는 걸 당신들도 알고 나도 알잖아! 그러니 최소한 거짓말은 하지 말아줘! 라고는 말이 목에 걸려 나오질 않았다.
.........
그런 행동을 이반 일리치가 평생 지켜온 '예의'라고 생각했다.
이반 일리치가 보기에 누구 하나 이반 일리치를 가엾게 여기지 않았는데, 그의 상태를 알고 싶어 하는 마음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들은 죽음과는 상관없는 사람들이라는 듯 아무도 이반 일리치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주지 않았고 그것이 더더욱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그를 외롭게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단 한사람 게라심만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위해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밤새 그의 요구에 따라 발을 들고 지키고있거나 용변을 처리하는 일도 스스럼없이 해주곤 하는 게라심만이 유일하게 죽음에 대해 언급해줍니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습니다. 그러니 이런 수고 좀 하는 게 무슨 대수겠습니까?"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척하는 사람들 속에서 어린아이처럼 굴고 위로받고 싶은 이반 일리치는 게라심과의 관계에서 이런 바람을 충족시켜주는 무언가를 느끼고 그에게 의지합니다.

그런데,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지 않은척 하는 것은 이반 그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그런 자신을 달래며 같이 울어주길 바랐다.
하지만 법원 동료인 셰베크가 찾아오자, 울면서 위로를 구하는 대신 진지하고 엄숙하며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으면서 오랜 버릇대로 대법원 결정에 대해 견해를 말하고는 자기 의견을 고집스럽게 주장했다.
다른 무엇보다 주변 사람들과 이반 일리치 자신의 이런 거짓말이 그의 마지막 남은 삶을 무너뜨리는 가장 무서운 독이었다.

 

 

 

점점 극심해지는 고통은 아편과 모르핀으로도 감당이 안되는 지경에 이릅니다. 통증과 아편으로 몽롱한 상태에서 그는 대답없는 신에게 속으로 외칩니다.

대체 자기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기에 이토록 끔찍하게 괴롭히는 것이냐고.. 

 

 

내면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흐름에 귀를 기울여보았다.
"네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그가 처음으로 들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분명한 개념은 바로 이 질문이었다
...........
"고통받지 않는 것. 그리고 사는 것."
.............
"사는 거라고, 어떻게 말이냐?"
영혼의 목소리가 물었다.
"그래요, 사는 것 말입니다. 예전처럼 사는 것. 건강하고 즐겁게 사는 것."
"예전에 네가 어떻게 살았지? 건강하고 즐겁게 살았던가?"
영혼의 목소리가 물었다.
그는 예전 즐거웠던 삶의 순간들을 기억 속에 떠올려보려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예전 즐거웠던 그 모든 순간이 이제 와서는 그때와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 말고는 모두 그랬다.
어린 시절 그때는, 다시 되돌릴 수 있다면 그것에 매달려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정말로 행복한 뭔가가 있었다. 하지만 그 행복을 느꼈던 사람은 이제 없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추억인 것만 같았다.
...................
그 시절에서 멀어질수록 좋은 순간들은 점점 더 줄어들었다.
그리고 갑작스러웠던 결혼과..뒤이어 찾아온 환멸. 아내의 입냄새와 성욕과 위선! 활기라고는 없던 공직 생활과 돈에 대한 걱정.
..................
산을 오르고 있다고 생각하며 걸었지만 사실은 산을 내려가고 있었던 거야. 정말 그랬어.
다들 내가 산을 오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꼭 그만큼 내 발밑에서는 삶이 멀어져갔던 거야.....
도대체 왜 이렇게 된거지? 무엇 때문이지?
이럴 수는 없어. 삶이 이렇게 무의미하고 추악할 수는 없는 것 아닐까?
삶이 이처럼 추악하고 무의미한 것이라면, 왜 죽어야 하며 그것도 이처럼 고통스럽게 죽어야 하는 걸까?
분명 뭔가 잘못된 거야.
'내가 잘못 살아온 건 아닐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다 하면서 살았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지?
............
하지만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도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종종 그랬듯, 이 모든 것이 그가 제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서둘러 자신이 늘 올바르게 살았음을 떠올리며 이 이상한 생각을 떨어냈다.

 

 

 

 

하지만 점점 더 심해지는 고통은 그 무엇으로도 상쇄시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가족들과 의사에게 심한 말들(건강한 그라면 예의를 차리느라 결코 하지 않을 말들)을 내뱉습니다. 

 

 

 

이반 일리치가 아내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녀는 말을 다 끝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남편의 눈길에서 자신을 향한 지독한 증오를 보았기 때문이다.
"제발, 편안하게 죽게 날 좀 내버려둬요!"
....
몸은 좀 어떠냐고 묻는 딸에게 머지않아 모두를 자신에게서 벗어나게 해주겠다고 싸늘하게 대답했다....

 

 

 

"고통을 덜어드릴 수는 있습니다." 의사가 대답했다.

"그것도 제대로 못하지 않소. 그냥 내버려두시오."

 

 

 

 

이제 의사조차도 아편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고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아편으로도 고통을 단축시킬 수 없자 결국  아내가 원하는 성찬을 받기도 합니다.

잠시 마음의 평안이 찾아오며 다시 삶에 대한 희망이 솟아오르지만 그것도 잠시뿐입니다.

또다시 끔찍한 고통이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었기 때문이죠.

자신이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는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삶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되돌아봅니다.

그러다가 문득 시종의 모습에서 아내와 딸, 의사의 모습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고 그 모든 것이 삶과 죽음을 가려버리는 무섭고도 거대한 기만이었음 깨닫게 되죠.

하지만 대체 올바르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올바른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침묵하고 귀를 기울였다.
바로 그때 누군가 그의 손에 입을 맞추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눈을 뜨고 아들을 바라보았다. 아들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아내가 그의 곁에 다가왔다.
그는 아내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아내는 입을 벌린 채 코와 뺨으로 흐르는 눈물을 미처 닦을 생각도 못 하고 절망적인 표정으로 남편을 바라보았다.
이반 일리치는 아내도 안쓰러웠다. ...

 

 

 

그때 갑자기, 지금까지 그를 괴롭히면서 떠나지 않으려 하던 것이 두 방향에서, 열 방향에서, 온갖 방향에서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것이 분명하게 보였다.
식구들이 안쓰러웠고, 그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해야 했다.
이 모든 고통에서 가족을 구해내고 자신도 벗어나야 했다. 그는 생각했다.
'얼마나 근사하고 또 얼마나 간단한 일인가!'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런데 통증은 어떻게 된 거지? 어디로 간 거지?
이것 봐, 통증,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이반 일리치는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아, 여기 있구나. 뭐 어때, 거기 있으라고 하지 뭐.'
'그런데 죽음은? 죽음은 어디 있지?'
이제는 습관처럼 익숙해져버린 죽음에 대한 공포를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죽음은 어디 있는 거야? 대체 죽음이 뭐지?
죽음이 없었으므로 죽음에 대한 공포도 전혀 없었다.죽음이 있던 자리에 빛이 있었다.
'그래, 바로 그거야!' 갑자기 그가 큰 소리로 외쳤다.
'이렇게 기쁠 수가!'
이 모든 일은 한순간에 일어났으며, 이 한순간의 의미는 이제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반 일리치는 죽음을 맞이하면서 소설은 끝이 납니다.

이 소설은 톨스토이가 1886년에 발표한 작품입니다. 그러니까 19세기 소설이죠..그렇지만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의 이야기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아 역시 고전은 고전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톨스토이가 왜 위대한 작가라고 평가받는지도 알 것 같습니다.

21세를 사는 우리도 죽음을 선고받으면 이반 일리치와 다를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고 부정하고 분노하다 결국에는 수용하게 되는 ..

이반 일리치가 자신이 제대로 산 것이 맞는지 의문을 품는 장면에서는 저역시 제대로 살고 있는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언제나 삶을 뒤쫓아 다니는 그림자 같은 것이니 저역시도 살아있는 한 죽음이라는 그림자를 떨쳐버릴 수 없겠죠.

그래도 우리는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오늘을 살아갑니다. 

이반 일리치는 죽어가기 직전 자신의 죽음을 진정으로 안타까워하고 슬퍼하는 아들을 바라보며 비록 자신의 삶이 완전하지 않았다해도 바로 잡을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분노하고 미워했던 이들에게 연민을 보냅니다.

그렇게 이반 일리치는 죽음과 손을 맞잡고 편안하게 떠날 수 있었죠.

 

우리는 죽을 때 아무 것도 가져갈 수가 없습니다.

평생 돈을 위해 살았건 명예를 위해 살았건 가족을 위해 살았건 우리는 아무 것도 가져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 걸까요?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나는 지금 많은 이들을 사랑해야겠습니다..."                   

  -윤동주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중-